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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공부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5-1

by Yulmuule 2024.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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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문호 개방 이후 울릉도와 독도 관리

🏝️1870년 일본 외무성의 보고서
일본은 1868년 이른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 일 본 신정부는 조선과 새로 국교를 맺고자 1869년 12월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 여 조선의 사정을 조사했다. 조사 후에 제출된 보고서인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 (1870년)에는 '죽도(竹島: 울릉도)와 송도(松島): 독도)가 조선에 부속 된 경위'라는 항목이 수록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울릉도(당시 명칭은 '죽도‘)와 독도(당시 명칭은 '송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보고서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 중에서 '죽도와 송도가 조선에 부속된 경위'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 건은) 송도는 죽도 옆에 있는 섬으로 송도 건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죽도 건에 관해서는 원록(元祿: 안용복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의 일본 연호) 연간 이후 잠시 조선에서 거류(居留)를 위해 사람을 파견한 적이 있으나 당시에는 이전처럼 사람이 없었습니다. 대나무 또는 대나무보다 큰 갈대가 자라 며, 인삼 등이 자연적으로 자랍니다. 그 밖에 물고기도 상당히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한 태정관 지령
일본 정부는 폐번치현(廢藩置縣) 을 단행하고 1876년부터 전국의 지적(地籍)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시마네 현에 '죽도(울릉도)에 대 한 기록과 지도 등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시마네 현은 '기죽도약도 (磯竹島略圖)를 첨부하고, 아울러 지적도에 '죽도(울릉도) 외의 한 섬'을 시 마네 현의 지도와 지적에 포함시킬 것인가 여부를 내무성에 문의했다. 기 죽도약도'에는 '송도'에서 '기죽도(磯竹島)'까지의 거리가 40리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송도'는 지금의 독도, 기죽도'는 지금의 울릉도임을 말해 주고 있다.

폐번치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1871년
•에 에도 막부 시기의 번(藩)을 폐지하 고 중앙 정부가 통치하는 부• 현(府•縣)을 설치한 행정 조치이다.

내무성은 시마네 현이 제출한 기록과 지도 그리고 17세기 말 조선과 교환 한 문서 등 울릉도•독도 관계 자료를 5개월 남짓 조사• 검토 한 후 두 섬은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결론지었으나 영토에 관한 중대한 결정이므로 태정관이 최종 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태정관은 1877년 3월 29일 "죽도와 그 밖의 한 섬에 관한 건은 본방(일본)과 관계없음을 알 것"이라는 지령을 하달했다. 이 지령은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니라고 인 정한 공식 문서이다.

태정관
메이지 유신 초기의 최고행정기관이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태정관의 이 지령에 나온 '죽도 외 한섬'의 '한 섬'은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죽도약도'에 '기죽도' 외의 한 섬이 송도로 표기되어 있으므로 '한 셈'이 '송도', 즉 독도임은 분명하다.

🏝️조선 정부의 울릉도 개척
1876년 문호 개방 이후에도 조선 정부는 수토 정책을 유지했으나 사람들 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인들도 나무를 몰래 베어 가거나 전복을 채 취하였다. 1880년대 초, 일본인이 울릉도에 송도(松島)라고 적은 푯말을 세워놓은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1882년 4월 고종은 이규원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와 주변 섬을 조사하도록 명했다. 당시 울릉도에는 조선인이 140여 명, 일본인이 78 명 있었다. 이규원은 100명이 넘는 수행원과 함께 조사한 뒤 '울릉도 검찰 일기 계초본(鬱陵島檢察日記啓草本)과 울릉도 지도인 울릉도 외도(外圖)
와 울릉도 내도(內圖) 2장을 고종에게 올렸다.
이규원의 보고를 받은 고종은 울릉도 개척을 명했고, 1883년부터는 주민 들이 정식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개척민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고 배 만드는 일을 허락하는 등 우대 정책을 실시하여 이주를 장려하는 한편, 김옥균을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 임명하여 동남해안 각 고을 을 살펴보고 개척하게 했다. 당시 울릉도에 두 번에 걸쳐 들어간 개척단은 모두 16가구, 54명이었다. 이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소 두 마리, 무기 등을 가지고 들어갔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를 비롯한 주변 도서를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동남제도 개척사
고종이 울릉도와 주변 도서를 개척하 기 위해 만든 관직이다.


하루에 조금씩 독도에대해 알아가볼게요!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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