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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공부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3-2

by Yulmuule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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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료에 나타난 독도
🏝️"세종실록"'지리지'의 기술이 지니는 의미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
이 별개의 두 섬임을 말하고 있다. "두 섬은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서로 바라볼 수 있다."라고 한 것은 흐린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울릉도 가까이에 관음도죽도라는 섬이 있다. 관음도는 울릉도 북동쪽에 붙어 있는데, 깍새섬이라고도 한 다. 죽도는 울릉도에서 약 2km, 배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섬이다. 대나무가 많아 '댓섬'이라고도 하는데, 한자로는(竹島죽도)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이 섬들은 맑은 날이 아니더라도 울릉도에서 잘 보인 다. 따라서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날씨가 맑으면 보인다고 한 '우산도'는 관음도나 죽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 증동국여지승람"의 우산도
"신 증동국여지승람" (1531년)에도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제목이 '우산도•울릉도'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별개의 섬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우산도(于山島) • 울릉도(鬱陵島)
무릉(武陵)이라고도 하고,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두 섬이 울진현의 정동 쪽 바다에 있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 "강계고"의 우산도
조선 후기의 학자 신경준(1712~1781년)이 지은 "강계고" (1756년)에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내가 살펴보니, '여지지'에, "일설에 우산과 울릉은 본래 한 섬이라고 하나 여러 도지를 상고하면 두 섬이다. 하나는 왜가 말하는 송도(松島 : 마쓰시마, 독도)인데, 두 섬은 모두 우산국이다."라고 했다.
-“강계고”-
<신경준>
조선 영조 때의 학자. 동국문헌비고' 편찬 당시 '여지고'를 담당하였다.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 부분은
"강계고' 내용을 계승하고 있다.

위의 글은 우산도에 대해 일본이 송도(松島), 즉 마쓰시마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울릉도죽도, 독도를 송도로 호칭했다. 그러므로 이 글로 우산도가 독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우산도와 울릉도가 우산국에 속한다고 한 것은 두 섬 모두 조선 영토임을 말한 것이다.

🏝️안용복과 독도
• 안용복 사건
안용복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일본에 두 차례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 선 땅임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우리나라는 '울릉도 쟁계(爭界), 일본은 죽도 일건(竹島一件)이라고 한다.
1693년에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안용복과 박어둔은 일본 오키로 납치되었다.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는 돗토 리 번의 조사를 받은 뒤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귀국 후의 진술에서, 자 신이 일본인 관리에게 울릉도와 자산도(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하여 이를 인정하는 문서를 받았으나 나가사키에서 빼앗겼다고 했다.

<박어둔>
1693년 3월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끌려갔다가 11월 부산 왜관으로 송환된 울산 출신의 어부이다.

이와 별도로 일본이 조선 정부에 보낸 문서에는 조선인의 울릉도 출어 금지를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때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싸고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이 시작되었다.
안용복은 1696년 봄 어부 4명, 양반 1명, 승려 5명과 함께 울릉도로 다시 들어갔다.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에 나타나자 안용복은 그들을 쫓아 일본 오 키 섬으로 들어갔다. 안용복은 오키 섬의 관리에게 조선에서 준비해 온 '조선팔도지도'를 보여 주며 울릉도와 자산도(독도)가 조선임을 주장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막부는 안용복 일행을 추방했다. 조선 정부는 안용복에게 허가 없이 월경했다고 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주장한 공을 감안하여 유배형으로 감해 주었다(1697년 3월).

하루에 조금씩 독도에 대해 알아가 볼게요!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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