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러일 전쟁과 일본의 독도 침탈
🏝️일본에 의한 독도 불법 편입 과정
러일 전쟁 당시 울릉도와 독도의 군사적 가치에 눈을 뜬 일본은 이전에 여러 번 일본 영역 밖의 무인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경험을 이용해 독 도를 편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독도의 강치사업이 유망한 데 주목한 시마네 현의 수산업자 나카이 요자부로는 한국 정부에 독도 이용 독점권을 요청할 계획으로 그 절차를 일본의 관료들과 의논했다. 그는 1904년 9월 29일 내무성•외무성 •농상무성 3 대신에게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여 나카이 자신에게 임대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때 일본 내무성은 "한국령으로 보이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할 경우 제 국주의 적 침탈 야욕을 의심받을 수 있다."라며 청원서를 기각하려 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무선 또는 해저 전선을 설치하면 적합을 감시하는 데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영토로 편입할 것을 주장했다.
일본 내각은 이 청원서에 의거하여 1905년 1월 28일 무인도 소속에 관 한 건'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로 호칭하고 시마네 현 소속 오키의 도사가 관할한다."라고 결정했다. 이어 2월 22일 '시마네 현 고시 제40호로 이를 고시했다. 일본 정부는 대한 제국 정부에 아무런 문의 없이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일방적으로 편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전까지 일본은 독도를 '마쓰 시마, '량코 도 ‘등으로 불러 명칭을 통일하지 못했으나 이 '시마네 현 고 시 제40호' 이후부터 독도의 이름을 '다케시마'로 변경했다.
강치
강치는 물갯과, 바다 사자아과, 강치 속으로 분류되는 포유동물이다.
량코 도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의 일본식 명칭이다.
🏝️러일 전쟁 중 독도에 관한 일본 기록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 호의 기록(1904년 9월 25일)에 의하면, "리앙코루 도 바위, 한국인은 이를 독도(獨島)라 쓰고 우리 일본 어부들은 '량코 도'라고 호칭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일본 정부가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기 5개월 전에 이미 한국인들이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 을 의미한다.
🏝️일본의 독도 불법 편입에 대한 대한 제국의 반응
일본은 독도를 편입했지만 이를 중앙 정부의 관보에 싣거나 이해관계 당사국인 대한 제국 정부에 알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한 제국 정부는 1년이 지나도록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906년 3월 시마네 현 관리들이 울릉도 에 와서 울도 군수 심흥택에게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 사실을 알렸다. 이에 놀란 심흥택은 3월 29일 강원도 관찰사 서리 겸 춘천 군수 이명래를 거쳐 참정대신 박제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참정대신 박제순은 "독도가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니 섬의 형편과 일본인의 행동을 잘 살펴 보고하라. “라고 지령했다(1906년 5월 10일). 그러나 대한 제국 정부는 이미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통감부가 설치된 상태여서 일본에 항의할 수가 없었다. 다만, "대한매일신보"(1906년
5월 1일, 황성신문 1906년 5월 9일), 유생 황현(黃玹)이 일본의 독도 침탈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울도 군수 심흥택 씨가 내부에 보고하되, "본군 소속 독도가 외 양 100여 리 밖에 있는데 이달 4일에 일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와 서 직접 말하기를,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일행은 일본 시마네 현 오키 도사 히가 시 분스케와 사무관 진자이 요시타로와 세무감독국장 요시다 헤 이고, 분서장 경부 가게야마 간하치로와 순사 1인, 회의 1인, 의사와 기수 각 1인, 그 밖의 수행원 10여 명인데, 가호의 총인구와 토 지의 생산 다소와 인원 및 경비와 제반 사무를 조사하여 기록해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성신문" 1906년 5월 9일-
🏝️독도 편입 후 일본의 자원 침탈
독도는 강치의 집단 서식지였다. 강치는 가죽과 식량, 등불용 기름 등으로 쓸 수 있어 큰 수익을 내는 해양 생물이었다.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독점하고 싶어 하던 나카이 요자부로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자 세 명의 다른 수산업자와 함께 합자회사를 설립하여 강치를 마구 포획했다.
1903년부터 강치를 잡아가던 일본은 1905년부터 1909년까지 연평균 약 1,300마리를 잡아갔으며, 이러한 남획으로 인하여 독도의 강치는 멸종되기 에 이르렀다. 또한 일본은 울릉도의 규목(느티나무)과 오징어, 전복, 김 등을 채취하는 등 많은 자원을 침탈했다.
하루에 조금씩 독도에 대해 알아가 볼게요!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7-2 (20) | 2024.10.16 |
---|---|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7-1 (20) | 2024.10.15 |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5-2 / 6-1 (12) | 2024.10.09 |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5-1 (8) | 2024.10.08 |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4-1 (4) | 2024.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