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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공부

”독도“ 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들! 11-1

by Yulmuule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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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독도 수호를 위한 우리의 노력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1945년 8월 광복과 더불어 독도는 자연히 우리나라 영토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연합국과 일본 간의 강화 조약 준비 과정에서 독도의 영유권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자, 한국 과도 정부는 독도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정부의 확고한 독도 영유 의식을 보여 주었다. 당시 파견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과도 정부의 수색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학자, 언론인, 공무원, 산악인, 사진 사, 무전기사 등 총 72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조사단이었다.
학술조사단1947년 8월 20일 울릉도를 출발하여 독도에 상륙한 후 동도에 푯말을 세우고 조사 활동을 벌인 후 저녁에 울릉도로 귀항했다. 이어 21일부터 25일까지 울릉도를 조사했다. 이들의 활동 상황은 신문을 통해 곧바로 보도되었고, 당시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를 '독섬'으로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학술조사단1952년 9월에도 두 차례 독도 조사를 시도했으나, 미국 항공기에 의한 독도 폭격 사건이 재발하면서 울릉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당시까지 '맥아더 라인'에 의해 독도에 근접하지 못하던 일본 어민들이 독도에 불법으로 상륙하는 일이 다시 빈번해지자 한 국 정부는 한국산악회 독도조사단을 구성했다. 30여 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독도조사단은 1953년 10월 독도에 도착하여 일본이 불법적으로 세운 다케시마(竹島) 표석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독도‘표석을 세웠다.

한국산악회
일제 강점기에 있던 산악 단체 회원이 1945년 9월 조선산악회를 창립했는데 1948년 정부 수립 후 한국산악회로 개칭하였다. 1946~1954년까지 전국에 학술조사단을 파견하여 국토 조사 사업을 벌였으며, 이 사업의 일환으로 1947년과 1953년에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하였다.

🏝️독도의용수비대, 독도경비대와 해양경찰
광복 후에도 일본 어선들이 독도 근해를 침범하고 심지어는 독도에 일본 땅이라는 푯말까지 세워 두 나라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53년부터 일본 인들은 노골적으로 독도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인 데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진행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빈번해진 일본의 독도 침범에 맞서 울릉도 주민 홍순칠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도의용수비대'가 경찰과 협력하며 독도를 수호하였다.
그 후에는 경찰이 독도에 상주하면서 경비를 담당했다. 1996년 6월 27일 경북지방경찰청 울릉경비대가 창설되면서 독도경비대는 그 산하에서 활동하고 있다. 독도경비대는 동도 정상부에 위치해 있고, 초소, 레이더 기지, 헬리콥터 착륙장 등을 갖추고 있다. 한편 독도 근해에는 해양경찰의 경비함정이 상시 배치되어 우리나라의 해양 주권과 바다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영토 주권 행사와 관련된 활동들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 이후 일본의 도발에 맞서 독도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해 왔다. 일본이 1953년에 우리나라가 세운 푯말을 철거하고 일본 푯말을 설치한 데 대하여 7월 국회에서는 '일본 관헌의 독도 불법 점거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이어 경상북도 의회 역시 이와 관련된 결의 분을 채택하였다.
정부는 1954년 8월 독도에 무인 등대를 설치하여 운용하기로 하고 이 사실을 서울 주재 각국 공관에 통보했으며, 9월 15일에는 독도 우표 3종을 발행하였다. 1997년에는 독도에 접안 시설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독도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일련의 주권 행사에 대하여 그때마다 일본 측에서는 항의 서한을 보내왔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독도는 대한민국 고유 영토이므로 이런 조치는 대한민국의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반 박하였다.

하루에 조금씩 독도에 대해 알아가 볼게요!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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